성우회(星友會) 안보현장 방문
2015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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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제 2사단 군악대
2015년 8월 4일, DMZ에서 북괴의 목함지뢰(木函地雷)도발(挑發)사건으로 상황은 전쟁직전까지 치달았다. 대통령의 신념(信念)을 따르는 온 국민들의 단합된 성원과 군(軍)의 철통같은 대비태세로 8월 24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남북 간 협상이 종료되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성우회(星友會)는 그간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최전방부대 장병들을 격려(激勵)하는 차원에서 수도권 서측방어를 책임진 해병 제 2사단을 방문하였다.
오전 9시 30분, 용산 국방컨벤션홀 앞에서 출발한 버스는 한강을 따라 김포반도로 향해 간다. 초가을 하늘은 청명하기 이를 데 없고 바람은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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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들녘
버스가 강화대교를 건넌다.
눈을 감으니 비운의 충청수사(忠淸水師) 강진흔(姜晉昕=?~1637)이 전선(戰船)을 이끌고 강 한가운데서 후금(後金=청나라) 군과 사투(死鬪)를 벌리는 환상(幻想)이 보인다.
또 한쪽에는 강화 남문에서 자폭한 김익겸(金益兼=1615~1637)의 부인이 거룻배위에서 아기를 낳고 있는 장면도 보인다. 유복자(遺腹子) 김만중(金萬重)의 탄생이다.
다리를 건너면서 병자호란의 비극을 상상하고 있었다.
다리를 건넜다.
그 오른편 다리아래에는 최초의 조선시대 해군사관학교 통제영(統制營)학당(學堂) 터가 남아있는데 그냥 통과한다.
고려궁지가 빠끔히 보이는 강화성터를 지나간다.
병자호란, 강화성이 함락되자 저 성벽 남문위에서 권순장(權順長) 별장(別將)은 화약궤(火藥櫃)에 불을 질러 자폭하고 그 형제, 부인 딸을 포함한 전 가족이 순사(殉死)했다. 내 11대조 할아버지시다.
상상의 나래를 접은 것은 군악대의 웅장한 행진곡이었다.
11시, 자동차가 해병 제 2사단 청룡회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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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장 현황보고
사단장 해사(海士) 39기 전진구(全振九) 소장의 환영인사에 이어 현황보고가 있었다. 김포에서 서해 우도까지 수도권 서측 해안을 책임진 사단장의 “절대 사수”각오가 든든했다.
해병 제 2사단은 1951년 2월 독립 제 5대대로 김포반도에 주둔하면서 나라의 고비 때마다 가장먼저 제일선에 뛰어든 찬란한 역사를 가진 부대다. 6. 25전쟁은 물론, 5.16혁명. 월남 참전 등등 청룡이 가는 곳에 국가의 진로(進路)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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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촬영
지난 화요일 새롭게 단장한 청룡회관은 우리가 첫 단체 손님이란다. 깔끔하기도 했지만, 후배들의 정성이 담긴 점심은 성찬이었다.
단체 기념촬영을 마치고 제적봉 평화전망대로 가는 길에 상장 대대에서 신형 상륙용 장갑차의 시범을 참관했다.
근접전투, 고막을 찢는 기관포 소리는 여기가 전쟁터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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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적봉 평화전망대
오후 2시, 적진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평화전망대 상황실에서 제 5연대장이 직접 삽판과 현장을 가리키며 브리핑을 시작 하는데, 지역 내의 역사적 배경부터 설명한다.
강화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 교동도의 연개소문 출생지, 항몽(抗蒙) 임시수도를 거쳐 교동의 삼도수군 통제영, 그리고 조선시대 5진, 7보, 53돈대가 현재까지 존재한단다.
연대장은 우리들 시선을 연백평야로 고정 시켜놓고, 우리 쪽의 김포평야와 비교를 해보란다. 예성강, 임진강 일대의 연백평야는 북측 쌀 총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데 금년은 극심한 가뭄에 쌀 생산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반대로 김포, 강화 교동평야는 사단의 소방차와 정부기관의 소방차가 총 출동해 밤낮으로 논에 물을 뿌려 가뭄을 이겨내고 대풍(大豊)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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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땅을 관측중인 홍순성제독
망원경을 통해 내 눈으로 확인해 봤다. 농부의 아들인 내가 봐도 상황이 심각했다. 그 들녘 너머로 개성의 송악산(松岳山)이 내 카메라에 잡힐 만큼 선명이 닦아 섰다. 송악산을 내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다.
전망대를 내려와 제적봉(制赤峰) 석비 앞에 섰다. 박정희 대통령의 뜻을 담아 1966년 당시 김종필 총리께서 글씨를 스셨단다.
“制赤峰, 붉은 적을 제압하라!” 그 석비(石碑)에서 북을 향해 돌아섰다.
파란 하늘에 코스모스 꽃이 전선의 향기를 품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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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송악산이 보인다.
그 코스모스 꽃길에 앉아 휴식중인 병들에게 닦아가서 말을 걸었다.
“무서웠지?” 빙긋이 웃는다. 물어 본 내가 주책이다. 눈앞에 적의 대포가 포문을 열고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무섭지 않았다면 빈말이지.
“지금은 어때?” “자신 있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듬직했다. 어깨를 두드려 주고 손을 잡아줬다. 손자뻘 병들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왔다.
돌아오는 길에 강화 역사박물관을 둘러봤다.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을 흉내낸듯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정작 보고 싶어 했던 어재연장군의 “帥字旗”(수자기)는 보이지 않았다. 강화 전쟁박물관에 별도 보관중이란다.

1871년 6월 USS 코로라도 함상의 수자기(백과사전)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때 미 해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미 해군사관학교에서 소장했던 것을 최근에 돌려받은 조선의 지휘관(指揮官) 기(旗)다.
강화사람들은 강화도를 “뚜껑 없는 역사관”이라 부른다고 한다.
용두돈대 역사 유적지 복원 탑에서도 이은상이 읊었다. “강화 땅 풀 한포기 돌 한 덩어리에도 역사의 향기가 묻어있다.”고.
남북대치의 긴장 국면에서 의연히 대치하고 있는 후배들을 격려하고 돌아오면서, 역사박물관을 둘러 본 것도 뜻 깊은 행사의 한 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