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는 글

9.17일 아침편지

정병식 2015. 10. 26. 13:37

      내전에 따른 학살과 살인.파괴와 질병. 굶주림과 추위 절망과 고통을 피하여.살길을 찾아 무작정 나선 무리들을 난민. 즉 피난민이라고 부릅니다. 그곳에서의 삶이 오죽하였으면 거기서 태어낳고 자랐으며 뿌리가 있는 정든 고향과 나라를 떠나 저렇게 혹은 이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품고 피난길에 오를까? 시리아의 난민들로 인하여 지금 유럽은 심한 몸살이를 앓고 있습니다.지금까지 많은 수의 난민들이 자유와 인간다운 삶의 환경을 찾아 나섰다가 바다에서 혹은 여기저기서 횡사한 사람의 숫자도 한두명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감당하지 못할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아이들은 유아들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래서 그렇게 죽고 영상을 통해서 유아의 죽음이 난민들에 대한 방치를(외면)더 이상 할 수 없도록 국제적인 관심과 행동을 하도록 여론이 형성이 되었고. 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은 움직이기 시작하였으며 연일 유엔 에서도 교황청에서도 각 국가들이 인권과 인도적인 차원에서 난민들을 위한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조취를 취하여 주도록 요청하는 판국인데. 각국의 이해관계가 달라서 난민들을 수용하고 받아드리며. 도움을 주겠다는 국가들이 있는가 하면.반대로 나몰라 식으로 대하는 국가들이 있기도 합니다. 난민들을 돌보는 것은 결국엔 돈과 직결이 되는 바. 난색을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돈도 어디 한두푼 드는 그런 것이 아니고.그외도 겪게 될 부담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골머리 앓게 됨은 당연하지만.산 사람을 그대로 죽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비용과부담.어려움은 있지만 인도적인 차원 에서 결정할 사안입니다. 시리아 난민들이 우리나라에 까지 올 것은 아니니. 우리는 상관이 없다?사실 탈북자들은 또 다른 형태의 난민들이 아닌가? 만약 국경을(휴전선)개방하고 남.북한이 마음대로 왕래하도록 한다면.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 사람도 많겠지만.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 사람의 이유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사람의 경우가 다를 터.북한이 급작스럽게 붕괴되면 대한민국으로 내려올 난민들의 숫자 상당할 터.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뭐 그래도 좋다 북한만 붕괴되라.그렇게 생각도 들고요. 무경험자들도 많지만.피난민의 생활을 뼈저리게 겪어 본 사람들.6.25 사변으로 발생한 피난민의 행렬.영화 국제시장을 통해.그 시대에 살지 않던 사람들은 다소나마 영상으로라도. 알게 되었으리라.피난가다가 죽은 사람도 아닌말로 한두명이 아닙니다.피난가다가 가족들이 헤어지게 되어서 이산가족이 된(비극)경우도 비일비재하였으니. 피난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차라리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더 이상 피난길에 오르지 않겠다고 하는 결정은 또 얼마나 많은 비극을 초래하였는가?등등. 어디로 피난 갔다고 해서 살만한가? 그것은 아닌데.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일말의 목적 하나만 가지고.아래로 아래로 시흥.오산.평택.천안.대구.그리고 부산까지... 이제는 다릅니다.과거와 다릅니다. 지금의 양상과 과거 6.25때와는 다릅니다. 과거에는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피난갔지만 이제는 어디로 피난 갈 때가 없습니다.피난 가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냥 지금 있는 현 위치에서 죽든지 살든지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면.부산까지(그이상)도달하는 판국인데.뭐 어디로 피난갑니까? 성경의 피난 살이.유대인 한 가정이 피난간 것 (룻기1장1-2절)피난은 전쟁을 피하여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근.굶주림등의 이유도 피난가게 하는 중요요소가 되는데. 정치적인 탄압이나 그외 여러가지 이유가 있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처럼.피난민의 생활에 대하여 혹독한 경험을 많이 한 민족도 드뭅니다.디아스폴라라 하여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진 고난의 과거역사들.... 피난간 여인(요한계시록12장6절)사실상 144.000명도 피난민 들입니다.유대인들은 대환란시에 다시 한번 집답적으로 피난 생활을하여야 합니다.문제는 그들을 도우시는 분이 주 하나님 이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대 환란시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마태복음25장34-40절)반대로 매몰차게 대한 다른 자들은 저주를받습니다. 개개인 개별적인 적용이나 판결이 아니라.민족적으로 적용되는 (32절)그런 사안입니다.암튼지.시리아 피난민들.하루속히 안정된 삶의 여건이 보장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보면 다윗 성도도 피난하면 단연 유경험자 아닙니까? 피난에 대하여는 나에게 말도 하지 말라. 이거겠지요. 하지만 그러기에 그는 남다른 은혜를 경험한 자입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여 방패시라.그렇습니다.성도도 어쩌면 피난민입니다.그러기에 주님의 도우심 즉 주님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시여. 환난날에 나의 도움이시라. 에이 난 피난민 되기 싫어 피난갈 일도 없으면 좋고. 주님께서 나의 피난처가 되서야 할 그런 상황이 없으면 좋겠어. 내가 환난 겪지 않으면 주님께서 나의 피난처 혹은 도우시는 분 의 역활도 하지 않을 수있으니 나도 좋고 주님도 좋다? 하하하. 몸이 어디로 이동하는 피난만이 피난이 아닙니다. 마음과 정신 영혼이 어딘가로 피하고 싶은 상태가 곧 피난갈 이유인데.삶에 지치고 고달프고 괴롭고 할때.피난가야 하는데. 바로 주님은 성도의 피난처이시며 안식처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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