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는 글

누구나 잔인성은 있다..

정병식 2015. 12. 21. 14:54

 


내 속에 존재하는 잔인성!
누구나 잔인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다스릴줄 아는 사람은

잔인성이 물러갈 수 있다.


 
하나님께
성령님께 잡혀잇는 자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내안에
악한 영들은 힘없이 물러갈 것이다.
 
성령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도록 나의 자아를 포기하십시요
 
주님께 나를 내어맞겨보십시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안녕'이라는 것은 '프랑소아 사강'의 소설 제목에서 말하는
'봉쥬르' 라는 뜻이 아니라 작별을 고하는 '아듀'인 것입니다.
사람의 내부에 기거하는 잔인과 작별하고 싶은 것입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서 바로 먹지 않고 산 채로 가지고 놀고 골려주다가 나중에
잠아먹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아마 배가 고파서 잡은 것이 아니라 이런 경우는
'잡는 재미'로 잡은 게 분명합니다. 사람도 때로는 동물 이하로 잔인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때 악마아게 쫓기우듯 정신없이 악할 때가 있습니다. 히틀러가 6백 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도 제정신이 아니고 전쟁이라는 것도 확실히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일어나는 전쟁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요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옥의 요청'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전쟁 도발자가 권좌에서 호의호식하다가
죽는다면 죽는 것만으로는 시원치 않습니다. 죽음 후에 무언가 '보응'을 받아야 될 같습니다.


전쟁의 피해를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만 잰다고 하는 거은 너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과부나 고아들이 겪은 심리적,
물질적 피해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프로이드가 말한 것처럼 삶의 본능도
 가지고 있지만 죽음의 본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빙산의 뜬 부분보다 가라앉은
 부분이 더 크듯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의 세계보다 반이성적인요, 반사회적이요,
파괴적인 요소입니다.


버트랜드 럿셀이 사람은 누구나 난흔(폴리가미)
의욕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에 '두 세계'
대조는 너무나 여실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육적인 것의 '가형' 뒤에 올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 5:25~26).

 




 



내가 잘 아는 사람 중에 과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상냥하고 다변합니다.
그는 "여자는 약간 다변한 편이 좋다"고 합니다. 전생연분인 것 같습니다.
그는 퇴근해서 집에 오면 부인이 조잘대는 것을 듣는 재미로 산다고 합니다.


부인은 무슨 이야기든지 실감나게 잘하는 솜씨를 가졌습니다. 이 남편은 집에 있을 때
잠시라도 부인이 옆에 없으면 싫어합니다. 그들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심지어 부인이 화장실에 가면 거기까지 따라가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한쪽은 이야기하는 재미로, 한쪽은 이야기 듣는 재미로 사니 천생연분임에 틀림 없습니다.


미텔란젤로는 자기가 마른 사람이니까 살찐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남녀간에 풍만하게 살찐 사람이 많습니다.


결혼 주례를 할 때 보면 키 큰 신랑의 신부는 키가 작은 예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힘이 센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다름'에 대하여 종종 불편을 느끼기도 하고 또 다름 때문에 오해와 갈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이 다름에서 오는 '멋, 조화, 기쁨,
상호보완'
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다름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어 가고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0~21).

 

오직 사랑의 부자

 

사랑의 원자탄이 되어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파수꾼이

되어 봅시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