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정병식 2015. 8. 1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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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카가 태어나던 2002년 2월에 처음으로 디카를 사서는

가끔씩 에니카의 자라나는 사진을 찍어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곤 서랍속에 고이 두기만 했었던 디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일년 반년전쯤 블러그를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블러그를 시작할 즈음에는 산행도 시작하였었는데

그 때부터 서랍속에 있던 디카를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도 잘 찍지 못하면서 유난히 '길'사진을 많이 찍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길'이란 말이 좋았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길'이란 말을 들으면 가슴이 설레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길들을 거치면서....스치면서...건너뛰면서...

걸어 가고 있는지요.

그리고 내 앞에 놓여진 길을 걸어가면서 나와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에 있어서 햇살처럼 반짝이는 기쁨도 맛 보고,

또 헤어짐에 있어서 이별의 깊고 깊은 아픔에 그 길은 또 얼마나 망연하였을까요.

그렇게 인생길에서 만나게 되는 만남과 이별은

그 어느 누구도 건너 뛸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다른때보다도 '길'에 관한 묵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내려와서 모든 것들이 새로운 길을 걸어 가고 있는 저에게

그녀는 유난히 저에게 호감을 보여줍니다.

제가 즉흥적이고 활달한 편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이지적이고 조용한 편이라고 할까요?

 

조금전에도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사실 주일인 오늘은 그녀와 Mesa에 있는 한 가톨릭고등학교 강당에서 개최될 세미나에 참석하기로 하였거든요.

지금부터 25여년전인 보스니아의 메주고리예라는 이름없는 산골마을에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마리아가 발현하셨는데 그때 그 장소에 있었던 6명의 어린아이중에 한 명인

미리야나가 와서 강의를 한다며 2주일전에 티켓을 사 두었다고...

그리고 저랑 같이 갈 수 있어서 기쁘다고 그 동안 여러번 말을 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제가 어제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걍 집에 있는 중이었습니다.

 

사실 전 그런 장소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믿음은 그런 기적적인 일들을 밑바탕으로 뿌리내리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마침 잘 됐다...아퍼서 못 간다고 하면 돼니까...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저랑 같이 갈 수 없게 되어서 힘이 없다고...다른 친구랑 기운없이 학교 운동장을 걸어가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놓이진 않았지만 둘이서 은총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저한테 새로운 만남의 '길'이 되고 있습니다.

침대에 누어서 그녀와의 이런 일을 생각하고 있다가 문득 언젠가 보았던 영화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 바디가 수면제를 먹고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몸 위로 흙을 덮어줄

사람을 찾아나서는 이야기인데,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아무도 그의 제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이 그의 제의를 수락하고 그를 따라 갑니다.

그러면서 바디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그의 이야기중에 있는 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아침 새벽동이 트기 전에
차에 밧줄을 실었어요.
난 자살하기로 굳게 마음 먹었죠.
난 미아네를 향해 출발했어요.
그 때가 1960년이었죠.
난 체리 나무 농장에 도착했어요.
그 곳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해가 뜨지 않았죠.
난 나무에 밧줄을 던졌지만 걸리지가 않았어요.
계속해서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난 나무 위로 올라가 밧줄을 단단히 동여 맸어요.
그 때 내 손에 뭔가 부드러운 게 만져졌어요.
체리였죠.
탐스럽게 익은 체리였어요.
전 그걸 하나 먹었죠.
과즙이 가득한 체리였어요.
그리곤 두 개, 세 개를 먹었어요.
그 때 산등성이에 태양이 떠올랐어요.
정말 장엄한 광경이었죠.
그리곤 갑자기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어요.
그 애들은 가다 말고 서서 날 쳐다보더니
나무를 흔들어 달라고 했어요.
체리가 떨어지자 애들이 주워 먹었죠.
전 행복감을 느꼈죠.
그리곤 체리를 주워 집으로 향했어요.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The Taste of Cherry 중에서-

 

체리를 계속 먹다가 문득 세상이 너무 밝다고 느꼈던 노인.

붉은 태양은 찬란하게 빛났고,

등교하는 아이들의 소리는 너무도 주위를 평안하게 만들어 주었고....

 

결국 바디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불현듯 삶에 대하여 강한 애착을 느끼게 됩니다.

만약 노인이 '죽는다는 것은 나쁜것이야...안됀다..' 하였다면 죽음을 꿈꾸는 바디의 마음을 돌리게 하였을까요?

'나도 그런적이 있었단다...너를 이해해..'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상대방의 죽을려고 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하니까...바디는 마음을 바꾸게 되지 않았을까...

바디는 자기의 마지막 길에서 만나게 된 노인을 통해서 귀한 생을 다시 살게 됩니다.

 

그럼...

결국 사람들에겐 진심으로 자신을 이해하여주는 사람이 옆에만 있다면

무슨 역경이든지 뚫고 걸어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길'

그래서 어쩌면 전 그 '길'너머를 그리워하게 되고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설령,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가 크다고 하여도

전 계속 그렇게 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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