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지르 부토(Bhutto) 전 파키스탄 총리의 죽음은 비극적입니다. 인구 1억6000만의 핵(核)무장국이자 강성 이슬람 무장세력이 암약(暗躍)하는 파키스탄은, 개방적이고 친(親)서방적인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무장세력들은 부토 암살을 기회 삼아 파키스탄의 탈레반화(Talibanization)를 가속화할 것으로 우려됩니다.
그러나 남(南)아시아 지역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영국 학자 윌리엄 달림플(Dalrymple)은 “부토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어떤 형태로든 그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잃은 순교자로 묘사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합니다. 달림플은 최근 미국 시사잡지 타임에 기고한 ‘이유 없이 된 순교자(Martyr Without a Cause)’에서 다음과 같은 냉정한 주장들을 펼쳤습니다.

▲베나지르 부토.
부토는 본능적으로 독재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PPP)의 종신 당수임을 스스로 선언했고, 남동생 무르타자(Murtaza)를 비롯한 그 누구도 이에 도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무르타자는 부토가 총리이던 시절인 1996년, 경찰의 총격에 의문사 당했다. 무르타자의 아내와 딸은, 부토가 그의 죽음을 사주했다고 믿는다. 부토가 이끌던 정부는 또 광범위한 인권 학대에도 연관됐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부토 재임 시절에 파키스탄 정부가 감금 중 사망, 납치, 학살, 고문 등과 관련해 세계에서 최악의 기록을 가진 나라 중 하나로 비판했다.
부토는 올해 초 민주적 성향의 변호사들이 페르베즈 무샤라프(Musharraf)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비판적인 대법원장을 무단 해임하려 한 데 반발해 대규모 반대 시위를 일으켰을 때, 이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다. 또 이들 변호사를 지지한 자신의 PPP 인사들을 당의 주요 라인에서 배제했다. 무샤라프가 지난 9월 귀국한 나와즈 샤리프(Sharif)를 4시간 만에 사우디아라비아로 다시 쫓아낼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덕분에 부토는 민주진영의 상당한 경쟁자를 제거한 셈이 됐다. 부토의 지지자 다수는 그가 무샤라프와 물밑 거래를 한 것을 PPP가 추구하는 바에 역행하는 배신으로 여겼다. 그가 유언장을 통해 실행한 마지막 행동은, 당(黨)이 마치 자신의 개인적 영지(領地)라도 되듯이 아들과 남편에게 지휘권을 넘긴 일이다.
 
▲부토의 아들 빌라왈(왼쪽)과 남편 자르다리.
부토는 눈에 띄게 능력 없는 통치자였다. 그의 총리 재임 초기 20개월 동안, 단 하나의 중요한 입법안도 통과되지 못했다. 2기에 걸쳐 재임하는 동안, 그는 그토록 서구(西歐) 미디어에 설파했던 자유주의적 주의주장을 전혀 실천하지 않았다. 대신, 파키스탄 정보부(ISI)는 그의 감시 아래 탈레반이 무장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정권을 잡는 것을 지원했다. 그는 또 이슬람 무장세력이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 줄 수 있도록 ISI가 이들을 훈련시킨 것 같은 재앙적 정책을 막기 위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부토가 이끌던 파키스탄 정부는 카슈미르에서 펼쳐지던 세속적이고 온건한 저항운동은 옆으로 밀어둔 채, 정부가 조직한 잔인한 이슬람 단체에 지원을 제공하고 훈련시켰다. 만약 부토가 ISI가 후원하던 무장세력에 대해 더 강경한 입장을 취했더라면, 9•11이 일어나지 않았음은 물론 그 자신도 살았을지도 모른다.
부토는 완전히 봉건적 영주(領主)였고, 여기서 비롯된 특권의식이 있었다. (그의 가족은 신드주에 많은 자산을 보유했다.) 파키스탄에선 민주주의가 단 한 번도 번창한 적이 없는데, 이는 토지 소유가 여전히 정치인들이 부상(浮上)하는 기반이 되는 현실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 파키스탄의 민주주의는 정말 선출적 봉건주의(elective feudalism)의 형태를 띤다. 부토가 자신의 봉건적 친구와 동맹자들을 내세운 뒤, 소작농(지지자)들이 확실히 이들을 찍게 만드는 식이다.
군부(軍部) 정권과 민주주의를 오락가락하는 파키스탄의 이면에는 엘리트들간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파키스탄의 산업계와 군, 영주 계급은 어느 정도 모두가 상호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서로 돌봐준다. 이들은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선 많은 것을 하지 않는다. 정부가 운영하는 교육시스템은 파키스탄 사회에서 거의 작동을 하지 않고, 가지 못한 이들에게 정의는 거의 실현되기 힘들다. 이런 현실이, 빈자(貧者)들을 근본주의자들의 품으로 내몬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무장세력.
서구권 분석가들은 정치로서의 이슬람을 반(反)자유주의적이고 비이성적인 형태의 ‘이슬람 파시즘’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파키스탄을 비롯한 곳곳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성공을 거두는 것은, 이들이 자신들을 부토 같은 서구화된 엘리트들에 맞서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는 전사(戰士)로 그려내는 능력 덕분이다. 부정 부패와 관련한 부토의 악명(惡名)은 이슬람 혁명세력의 전략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부토 정부 시절,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의 하나로 꼽혔고, 부토와 남편 아시프 자르다리(Zardari)는 나랏돈 15억 달러(약1조4100억 달러)를 스위스 은행 계좌를 통해 세탁한 혐의로 고발됐다. (부토는 작년 10월 귀국 전 무샤라프에 의해 사면을 받았지만, 자르다리에 대한 고발은 지금도 유효하다.)
엘리트들 사이에 만연한 부패. 빈곤층에게 사회정의는 물론, 먹고 사는 데 가장 필수적인 것들조차 제공 못한 국가의 실패. 이 두 가지가 파키스탄에서 이슬람세력이 일어나게 만든 중요한 이유다. 이들은 이 나라의 영주와 그들의 사촌격인 군에 덤빌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의석 수를 늘려가고, 아프가니스탄과 접경한 서부지역의 상당 부분을 통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베나지르 부토는 분명 용감하고, 배짱 있고,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파키스탄이 안고 있는 문제의 중심이었지,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남승우 기자 futurist@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