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가지 유형의 인간 : 나 vs 우리
사람의 유형을 나누는 기준은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부자와 빈자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고 온순한 사람과 사나운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고 순진한 사람과 약삭빠른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중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입장이지요.
한 유형은 진리가 있으며 자신의 생각하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하는 사람이요, 다른 유형은 진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꼭 진리라고 확신하지 않는 사람이지요.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두가지 유형의 인간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결과는 천양지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한다면 전자는 사회에서 대립과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큰 반면에 후자는 사회에서 타협과 화합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유는 자신의 생각은 옳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남의 생각은 그르다고 확신하게 되면 남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생각이 같은 사람은 동지요, 생각이 다른 사람은 적으로 간주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서 후자는 자신의 생각이 정말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되며, 불완전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공통의 분모를 찾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전자는 세상의 중심에 '나'를 두는 반면 후자는 '우리'를 세상의 중심에 두게 되는 것이고, 이념적으로 보면 전자는 권위주의로, 후자는 민주주의로 나아갈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이를 두고 한 유명한 사람이 재미있게 표현을 했더라고요.
전자의 유형이 구축한 세계는 역피라드형인데 반하여 후자의 유형은 피라미드형의 세계를 구축한다고요.
무슨 얘기냐 하면,
전자는 몇 가지의 전제를 토대로 머리 속에서 거대한 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에 구축된 세계의 모양이 비유하자면 역피라미드의 모습과 같고, 후자는 현실 속에서 경험적으로 얻은 지식들을 하나씩 쌓아가면서 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에 피라미드 모습의 세계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피라미드 모양의 세계는 몇 군데 손상을 입어도 금방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지만, 역피라미드 모양의 세계는 전제 가운데 하나만 손상을 입어도 전체가 무너질 위험에 처한다고 부연설명을 했습니다.
또 다른 유명인은 전자의 유형으로서 대표적인 사람을 향하여 이런 비판을 했답니다.
보기에는 아주 멋진 집을 지었지만 그 집은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부적합하다고요.
아마도 이 사람이 후자에 대하여 평을 했다면 '집이 보기에는 좀 엉성하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다'고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기서 두 유형의 차이에 대한 얘기가 끝나면 그만이겠지만 차이에 대한 얘기는 하나 더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야 말로 어쩌면 위에서 말한 차이보다 훨씬 중요할지 모르겠습니다.
뭐냐고요?
전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 '자신이 생각한 것은 진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그런 확신이 바뀔 가능성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진리가 시간이 흐른다고 바뀐다면 그것은 진리도 아니지요. 그러니 이미 내린 결론에 변경이 가해지는 것에 대해서 저항감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계속 편견을 가지고 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후자는 어차피 자신의 생각이 진리라는 확신을 가지지 않아서 남과 지속적인 의견교환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하여 진리에 점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시간에 흐르면서 기존에 가진 생각을 전혀 새로운 생각으로도 바꿀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져 있게 됩니다.
아마도 전자를 닫힌 마음의 소유자라 한다면 후자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예전에 신문에서 났던 기사를 끄집어 내 볼까요?
아이까지 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몇 년 살지 못하고 부인이 남편을 대상으로 법원에 이혼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에서 이혼하라는 판결을 내린 적이 있었지요.
부인이 이혼소송을 낸 것은 간단히 말해서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였지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에 책임을 져야 할 남편이 가정에는 소홀히 한 채 사회개혁을 하겠다고 매일 데모나 해댔기 때문이지요.
가족의 불행이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생긴 것이니 사회개혁을 하지 않고서는 가정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나요.(완전 어이 상실ㅋ)
그 결과로 가족의 생존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었고 급기야는 부인이 찢어지자고 나온 것이지요.
결과는 찢어졌고요.
두 가지의 유형은 시장(market)과 관련시키면 비현실성과 현실성의 차이가 좀더 명확히 드러나게 됩니다.
시장이란 무엇입니까?
공급자와 수요자가 만나는 장소지요.
공급자는 자신이 만든 물건을 팔아야 하는 쪽이고 수요자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야 하는 쪽입니다.
그래서 시장은 서로 반대의 의사를 가진 사람이 물건을 매개로 협의하고 타협하는 장소인 셈이지요. 특히 물건을 팔아야 하는 공급자인 기업인은 수요자의 마음을 사야 합니다. 즉, 자신의 취향이나 의견보다는 남의 취향이나 의견을 존중해야 살아남는 존재인 셈이지요.
이를 두고 미국의 어떤 학자는 자본주의의 핵심은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라고까지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남을 만족시켜야 살 수 있으니 하는 말이지요. 나와 남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를 남에게 맞추어 나가는 것, 바로 위에서 말한 후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면 전자의 유형은 시장에 맞지 않을까요?
예, 맞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만들어 시장에 내놨는데 전혀 팔리지 않았다고 가정합시다. 이에 대해서 전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어떤 말을 할까요?
당연히 수요자를 멍청이라고 하겠지요. 수준이 떨어진다고도 하겠지요.
수요자의 수준이 떨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성향의 사람이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이지요.
이는 진리입니다.ㅋ
아마도 추정컨대, 지난 대선에서 박살이 난 지금의 집권자들은 속으로 국민을 조롱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국민은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허접쓰레기같은 존재들로 간주하고 있을테니까요.
극단적으로 두 가지의 대립적인 유형을 가정했습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지니고 사는 것이 인간일 것입니다.
때론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도 생각하면서도 때론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남이 생각하고 있으니 남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전자에 치우친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 아니면 후자에 치우친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은 발전이 따를 수도 있고 정체될 수도 있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신만 고집하는 삶이 아니라 남의 입장까지 고려하면서 사는 길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